어릴 적 기억 속 할아버지의 손은 늘 흙먼지가 묻어 있었고, 손톱 밑은 굳은살로 까맸다. 배움의 기회가 넉넉지 않던 시절을 지나온 탓에 할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가방끈’이 짧으셨다.
어려운 한자어나 세련된 정치 철학 용어는 알지 못하셨지만, 할아버지에게는 그 어떤 학자보다 단단하고 분명한 삶의 원칙이 있었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지 마라”, “약한 사람 등치지 말고, 이웃이 어려우면 밥 한술이라도 나눠라.” 가방끈 짧은 노인이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온 이 투박한 한마디 속에는 정치가 지향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가치인 ‘염치’와 ‘정의’가 온전히 담겨 있었다.
말보다 묵묵한 태도로 사람과 삶의 터전을 귀하게 대하던 그 우직한 모습. 그것이 필자가 유년 시절 목격한 가장 순수하고 정의로운 ‘생활 정치’의 시작이었다.
오늘날의 정치를 바라본다. 여의도를 채우고 지역을 활보하는 수많은 정치인의 이력서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국내외 명문대를 졸업하고 고시에 합격한 수재들이 가득하지만, 정작 정치가 머무는 자리는 시민의 삶과 멀어져만 간다.
어려운 정책 용어와 현란한 말솜씨로 포장하지만, 그 속에는 선대의 우직한 ‘염치’와 이웃을 향한 ‘측은지심’을 찾아보기 힘들다. 권력을 잡기 위한 정쟁과 눈치 보기는 넘쳐나는데, 정작 쇠락해 가는 골목과 떠나가는 청년들의 한숨을 살피는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지역 발전 역시 마찬가지다. 화려한 청사진과 수천억 원대 예산이 적힌 공약이 선거철마다 쏟아지지만, 지역민이 체감하는 온도는 차갑기만 하다. 가방끈 짧았던 할아버지가 묵묵히 흙을 고르고 땀방울로 삶의 터전을 일구었듯, 진정한 지역 발전은 ‘사람이 다시 살 만한 터전’을 만드는 기본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역의 미래를 살리는 정의로운 정치는 거창한 이념에 있지 않다.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도 일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것, 평생 땀 흘려 지역을 지켜온 어르신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든든한 사회안전망을 펴는 것, 그리고 중앙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지역의 자존과 자치를 우직하게 지켜내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학력은 짧았을지언정, 삶으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지금 우리 지역과 국가에 필요한 리더십 또한 다르지 않다. 말의 성찬에 능한 지식인이 아니라, 현장의 땀방울을 두려워할 줄 알고 약속을 지키는 정직한 일꾼이 필요하다.
더 이상 배움의 길이가 아닌 ‘책임의 무게’로 정치의 품격을 증명해야 할 때다. 가방끈 짧은 우리 모두의 할아버지들이 피와 땀으로 펼친 이 터전 위에, 이제는 우리가 진심과 정의로움으로 새로운 희망을 얹어야 한다.